-전라북도 전주 기전여학교, 기미년 대한독립 만세운동

12일 밤 가정을 떠나는 광경이야 일우 말할 수 없다.

그리운 부모님을 작별할 때 아모조록 잘 갓다오너라 하시는 말삼 그 말삼에 응답은 나오지 안코

녜. 저는 나라에 밧친 몸이오니 가면은 다시 오지 못할 것으로 각오하시오 하고셔 떠나는 그 시는 저녁 十時가 넘어서 인적이 고요할 때 틈을 타셔 집회장소로 가려한다.

의복차림은 액기말을 다러 간단하게 입고 머리는 쫑쫑 따서 간단하게 하고 신발은 짚세기에 들메를 하야 버서지지 안토록 신고 두 겨드랑이에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뭉치식 껴안고 몸으로 감추기 위하야 쓰게치마를 쓰고 인적이 고요한밤 달 밝은 밤에 왜놈의게 발각이나 아니될가 무서워 떨며 남문아래 모 동지의 집으로 모혓섯다.

동지들이 모혀 한자리에 밤을세우고 잇흔날 곳 그날 오정 남문 인경이 울리는 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섯다가 뛰여 나가서 장터로 일제히 나가 독립선언서와 택극기를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 장군들은 다 이러나 갓치 만세를 불었다.

두손에 기를 놉히 들고 소래를 질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우리 기전학생은 제일 압장을 서서 다름질을 하야 경찰서 마당을 향할세 생전에 불러보고 싶은 대한독립 만세를 한도업시 목이 터지도록 부르니 목이타고 피가 넘어오는 것 갓더라. 기미년은 맛참 국상때라 대한민죡이 국복을 입은 때라. 국부를 일코 엇더타고 그 마암을 말못할 그때 마암속에 북벗치는 설음은 하날에 사못처슬 것이라 그날이 장날인대, 만세소래가 진동하니 엇던 인간이 가만히 잇는자잇서르랴. 수만 군즁은 태극기를 집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실컷 불었던 것이다.

우리는 경찰서압흐로 들어가니 수만 군즁이 따르난대 그때 깃쁨이야 엇지 다 기록하리오 왜인들아 천만뜻박게 이게 무슨 소랜가 하고 나오나 뜻밖에 엇덯게 할 도리가 업서 체포를 하기에 당황하다 붉은 잉크를들고 나와 막 뿌려서 표를 하야 잡앗다.

우리 연약한 녀학생을 머리채를 잡아 막 흔들고 때리고 끌녀 구두발로 차고 박아직소하며 책 치니 쓰러지며 너머지며 뺨을쳐도, 대한독립만세를 불엇다. 유치장에 드러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 더 차고 때리더라.

경찰서 유치장으로 끄을고 드러가니 유치장이 메어져 남녀를 잡는대 여학생을 별도로 가도와 놋고 보니 죽을가봐 저녁밥을 갓다 주는대 모래갓치 넘어가들 안터라.

저녁 아홉시쯤 문호를 하는대 사방에 들니는 소래, 매맛는소래, 아이고 하며 우는 소래, 차마 못 듯겟는대 마맘에 독이 밧삭 오르며 분한마음 금치 못하겄드라.

우리 여학생은 만히 다치지는 아니 하고 살살 달래다가 소전 매로 책상을 탁치며, 고함을 치며 문호를 한다.

우리는 절대로 대한독립을 원한다. 우리는 누가 식힌 것이 아니라 내가 왜경하에 살기 실혀, 독립하기 원하야 불럿다 하니 여자라고 꼴로 볼것 아니댜 하고 혹 엇던자는 내 보낸 우리는 저녁 11시 경에 오동마차를 태와서 형무소로 보내엿다.

감방에 드러갈 때 녀간수가 나와 우리 의복과 몸수색을 다하고 보선을 벗겨서 감방문을 열고 드러가라고 하는대 어둡기는 한 대, 왠 죄수인지 누른 옷을 입고 자다가 모도 이러나는대, 이것들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드러 가랴니 몸이 실죽하드라 별수 업시 각각 난호여서 이방 저방으로 드러갔다. 감방 뭄닷는 소래. 참말 듯기 실트라.

드러가 보니 캄캄한 마루방에 대소변을 그 속에서 보니 엇지나 냄새가 나던지 참말 기가 막히더라. 사람은 만하 눌수도 없고 가만히 안저 생각하니 기가 막히더라.

뜬 눈으로 그날밤을 새고 잇흔날 아침 간수가 오더니 방망이 잇는 죄수를 다 마당에 줄을 지어 세우고 손을 벌니라 하더니 소금을 다 주고 세수를 식히고 다른 죄수는 다 일터로 나가는대 우리 학생은 다 각각 자기 잇던 감방으로 드려 보내고 또 또 커다란 나무궤착을 갓다놋고 패를 다 채워서 무릎을 꿀녀 안치고 문을 덜크덩하며 닷는대, 문소리 정떠어 지더라 문구멍을 내놋코 각금와서 보고 가고 잘못 안즈면 야단도 맛고 때리기도 하야 꼭 개나 도야지 갓치 취급하는대 열이 밧작 밧작 날때도 만흔대 어느날 밤에 지는 부슬부슬 오는대 우리방에 있는 몇사람을 막무 창가를 빡하엿더니 밤즁에 왜놈 간수가 와서 마당에다 내어 낫코 차고 때리고 벌을 쓴 일도잇다.

사흘만에 혹은 일주일 만에 재판소에 가서 문초를 맛고 또다시 도라온다. 부모님들은 행여나 죽이지나 아니 하엿는가 피뭇은 옷이나 아니 나오는지 하고 날마다 형무소 밧게서 세월을 울고 불고 지내섯다. 왜놈이 무서워 떨며 잠을 일우지 못하섯다고 하셧다.

머리에는 용수를 씨우고 신발은 일본 조리를 신기고 허리에 포성줄을 매여, 남 간수들이 줄을 잡고 따라온다. 오동마차를 태워서 재판소 마당에 나리면서 용수틈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 녀학생의 재판구경을 하려고 수업시 방청인은 마당에 꽉찻다.

검사실로 드러가서 용수를 벗기고 문초를 시작한다. 만세 부른 동기와 선언서와 태극기를 어대서 만들엇스며, 피동인가 자동인가 무슨 까닦으로 만세를 불넛는가, 일본 정치가 실트냐 별별 말을 다 뭇고 대답대로 다 기록하야 서류는 수십장에 이르더라.

재판을 밧고 다시 간수의 지도대로 형무소 감방으로 왓다.

그래도 왜놈들이 거죽으로는 미워하고 독을 흘녓지만 내용으로는 우리 녀학생을 울어러보고 감탄 하고 함부로 괄세를 못햇다.

날마다 무릎을 꿇고 앉어 기어 실증이 나서 다른 죄수와 갓치 일어나 날마다 감방에 가도와서 썩은 구린내 나는 고통 엇지면그리도 죽겠는지 머리가 다 빠릿지경이다.

그래도 무서운 그속에서도 천진란만한 우리는 간수업는 틈을 타서 니러서기도 하며 여러달을 거울을 보지 못하니 서로 처다보고 웃다가 간수의게 들키면 혼도 나고 맛기도하며 구두발로 채기도 햇다.

어느 날은 눈이 펄펄 날리는 아참에 우리를 마당에 안처놋고 치워서 떠는 꼴을 구경삼고, 어떤때는 세면 바닥 찬대다가 무릅을 꿀여 안치기도해 하도 다리가 압하서 움직이면 차듸차게 얼은 다리를 구두발로도 차고 때리기도 햇다.

별별 수단을 다하야 우리녀학생을 고생을 식히면 항복하리라 생각하고 여러 가지로 모욕을 하엿다. 엇던 때는 잘못햇다고 자백하고 다시는 아니한다고 하면 집에 갈터인대, 녀학생들이 부모도 안보고십흐냐 말만 잘하면 보내준다고 꼬이는 때도 잇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이나 나죵이나 한 마암으로 복종치 아니하고 날마다 일구월심 내나라 독립을 위하야 참고 견대고 잇섯노라. 마질때마다 문쵸를 할수록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굿어졋다 몃날이 못되여 집에서 가져오든 사식도 끈코 감옥소 밥(콩과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먹을 수가 업더니 아니 먹엇더니 속 업는 것은 참자라 그것이라도 먹고 대한독립하기만 기다리자 눈을 감고 하나님전에 빌려 살아계신 내주님 십자가에 달녀서 피를 흘니시고 날을 보시며 오냐 나를 오라 하시는 듯 눈에 어린다.

오 내 주여 대한을 불상히 보쇼셔 할때 괴롬도 업서진다. 갓치 드러온 친구들도 어대다가 가도놨는지 궁금하기도 하며 생사를 아지 못하야 답답도 한때도 잇섯다.

세월이 여죽하야 어언간 감옥생활도 봄철이 다 지나고 녀름이 왓다 일기는 더웁고 밤이면 모기는 우리의 피를 먹겟다고 덤비니 아모리해도 잠을 자지 못하고 번민속에서 지날때도 잇더라.

어느날 일기가 더울 때 볏을 나는대 “바람쏘이인다는 말을 볏헤 넌다고”하며 뜨거운 마당에 무릅을 꿀녀 안처노흐니 졸음도 오고 더웁기는 하야 견대기 어려운 때도 잇섯다.

어언간 七月 달이 당하엿다.

몇 달 동안 심문한 결과에 구형 6개월· 언도를 바렷다. 우리는 다시 복심법원에 상고를 하엿다.

대구를 향하야 우리 일행은 밤차로 떠나 정거장에 나니니 신명여학생과 유지들이 환영도 하드라 법원에서 심문을 한 결과는 여자라서 집행유예 삼년언도를 받았다.

구형당한 13인 김인애, 최금주, 김공순, 임영신, 함연춘, 김순애, 김나현, 최요한나, 정복수, 송순희, 최애경, 김신희.

저작권자 © 투데이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